Coursera에 「Financial Modeling: Statements, Costs & Forecasts」라는 강의가 있다. 재무제표에서 출발해 원가와 매출 예측을 지나 밸류에이션까지 가는, 열두 모듈짜리 재무 모델링 강의다.
이 시리즈는 그 강의를 한 모듈씩 따라가며, 강의가 세운 개념을 다시 뜯어보는 기록이다. 강의를 그대로 옮겨 적는 요약이 아니라, 강의를 렌즈 삼아 익숙한 개념을 새로 비춰 보는 글이다. 첫 편의 주제는 유동성이다.
강의가 세운 직관
강의는 질문 하나로 문을 연다. 두 회사가 똑같은 이익을 신고했다. 그런데 한 곳은 공급업체에 대금을 치르지 못하고, 다른 곳은 넉넉한 현금을 쥐고 있다. 무엇이 둘을 갈랐는가. 유동성이다.
여기 깔린 직관은 회계를 만져본 사람에게는 익숙하다. 이익과 현금은 다르다. 손익계산서가 흑자라고 해서 곳간에 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장부상 이익을 내고도 당장 갚아야 할 것을 못 갚으면 회사는 그 순간 멈춘다. 흑자도산이 그것이다.
그래서 유동성은 "이 회사가 장기적으로 건강한가"를 보는 지표가 아니라 "지금 당장 숨을 쉬고 있는가"를 보는 지표다. 강의가 앞으로 손에 쥐여줄 도구는 세 개의 비율이다. 유동자산을 유동부채로 나눈 유동비율(current ratio), 그중 재고처럼 현금화가 더딘 것을 뺀 당좌비율(quick ratio), 아예 현금성 자산만 보는 현금비율(cash ratio). 회사가 단기의 의무를 감당할 여력이 있는지를 서로 다른 엄격함으로 재는 세 개의 잣대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이야기다. 그런데 강사가 유동성 위기의 대표 사례로 꺼낸 하나는, 한 번 멈춰 들여다볼 만하다.
SVB라는 예외
강사가 든 사례는 2023년 실리콘밸리 은행(SVB)의 붕괴다. 며칠 만에 무너진 극적인 사건이라 이야기의 훅으로는 완벽하다. 그런데 SVB는 방금 강의가 소개한 그 세 비율로는 잡히지 않는 붕괴다. 무너지기 직전까지 그 비율들은 오히려 멀쩡해 보였다. 무너뜨린 엔진이 흑자도산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달랐는지는 이야기로 푸는 편이 빠르다.
어느 은행 이야기
어떤 은행이 있다고 하자. 한 손님이 1000만 원을 맡기며 말한다. "언제든 달라고 하면 바로 돌려줘." 이것이 예금이다. 은행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고, 만기가 사실상 없다. 언제든 콜이다.
그 돈을 금고에 놀리기는 아까워서, 은행은 연 1.5%가 나오는 30년 만기 국채를 산다. 손님에게는 예금 이자로 0.1%만 주면 되니, 그 차이가 은행의 몫이다. 이것이 은행이 돈을 버는 방식 그 자체다. 짧게 빌려 싸게, 길게 굴려 비싸게. 만기 변환(maturity transformation)이라고 부른다. 평소에는 손님들이 조금씩 넣고 조금씩 빼니 금고에 늘 여윳돈이 돌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두 가지가 동시에 터진다.
첫째, 시장 금리가 1.5%에서 5%로 뛴다. 그러면 은행이 쥔 "연 1.5%짜리 30년 국채"를 누가 사겠는가. 지금 새로 사면 5%를 주는데. 그래서 그 국채의 시장 가격이 폭락한다. 1000만 원을 주고 산 것이 700만 원이 된다. 다만 아직 팔지 않았으니 장부상의 손실이다. 만기까지 들고 있으면 원금을 다 받으니 괜찮다고, 은행은 스스로를 다독인다.
바로 그때 둘째가 터진다. 손님들이 겁을 먹고 한꺼번에 몰려와 돈을 빼달라고 한다. 그런데 금고에는 현금이 없다. 전부 30년 국채에 묶여 있다. 돈을 돌려주려면 그 국채를 지금 시가 700만 원에 팔아야 하고, 그 순간 장부상이던 300만 원의 손실이 진짜 손실로 확정된다. 그렇게 팔아도 1000만 원이 안 되니 손님들의 돈을 다 돌려주지 못한다. 그 순간 파산이다.
이것이 SVB다. 언제든 빠질 수 있는 예금이라는 짧은 돈으로 장기 국채와 주택저당증권이라는 긴 자산을 샀고, 금리 급등으로 그 자산의 시가가 깨진 상태에서 예금 인출이 몰리자 하루 만에 무너졌다.
왜 비율로는 안 잡히나
왜 이것이 유동성 비율로 잡히지 않는가. 그 장기 국채를 회계상 만기보유증권으로 분류하면, 시가가 아무리 떨어져도 그 미실현 손실이 장부에 곧바로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부에는 여전히 원가로 잡혀 있어 겉으로는 멀쩡해 보인다. 애초에 은행에는 사업회사처럼 유동비율을 들이대지도 않는다. 그것부터가 은행이 다른 엔진으로 돈다는 증거다.
그 멀쩡함은 "팔지 않는다면"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다. 그리고 뱅크런은 정확히 그 가정을 깨뜨리는 사건이다. 안 팔아도 되던 자산을 팔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 그래서 은행의 유동성은 비율이 아니라 만기 구조와 예금자의 신뢰로 봐야 한다.
이 어긋남을 duration mismatch, 만기 불일치라고 부른다. 은행이 언제 돌려줘야 하는 돈(예금, 만기가 짧다)과 언제 돌려받는 돈(국채, 만기가 길다)의 시간이 맞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채권의 duration이 정확히 걸린다. duration은 금리 민감도이고, 길수록 금리가 조금만 움직여도 가격이 크게 출렁인다. 짧은 부채는 duration이 거의 0인데 긴 자산은 duration이 크니, 이 duration의 격차가 곧 mismatch의 크기다. 그리고 이 시간의 불일치는 은행의 밥벌이인 동시에 급소다. 잘 굴러갈 때는 이자 차익의 원천이고, 신뢰가 흔들리는 순간 급소가 된다.
같은 이름, 다른 엔진
그러면 흑자도산과 SVB는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같은 것은 이름이다. 둘 다 "유동성 위기"라고 불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둘 다 하나의 부모에서 갈라져 나왔다. 단기의 의무를 유동 자원으로 감당하지 못한다는 것, 그 뿌리는 같다.
다른 것은 엔진이다. 사업회사의 흑자도산은 운전자본의 순환이 막혀 일어난다. 현금이 매출채권과 재고에 묶여 돌지 않는 것이다. 강의가 가르칠 세 비율은 바로 이 엔진을 잡으라고 만들어진 잣대다. 반면 SVB는 자산과 부채의 만기가 어긋난 상태에서 금리 급등과 신뢰 붕괴가 한꺼번에 덮쳐 무너졌다. 은행은 만기 변환 자체가 사업 모델이라 이 위험을 구조적으로 안고 산다. 그래서 같은 잣대로 재려 하면 잡히지 않는다. 아이러니는 여기에 있다. 강사가 유동성의 대표 사례로 든 SVB가, 정작 강사가 가르칠 도구로는 진단되지 않는다.
무엇이 갈리는가
강사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SVB는 훌륭한 훅이고, 유동성이라는 주제로 사람을 끌어들이기에 이만한 사례가 없다. 핵심은 다른 데 있다. 같은 문장을 듣고도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느냐다.
누군가 SVB를 유동성 위기의 사례로 꺼낼 때, "그건 운전자본의 유동성이 아니라 만기 불일치였다"라고 짚어내는 사람과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서로 다른 깊이에 선다. 그 차이는 새로 외운 지식에서 나오지 않는다. 강의를 요약하는 대신 렌즈로 들을 때, 이미 아는 것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나온다.
이 시리즈가 지향하는 것이 그것이다. 강의가 준 것을 그대로 옮겨 적는 노트가 아니라, 강의를 렌즈 삼아 익숙한 개념을 다시 보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기록. 1강이 가르친 것은 유동성이지만, 1강이 남긴 것은 "같은 이름을 의심하라"는 한 문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