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해석은 플레이어의 자유다. 다른 해석은 있어도 틀린 해석은 없다." — 미야자키 히데타카


다크소울 1을 하고 있다. 아직 한참 남았다. 두 번째 종도 못 울렸고, 병자의 마을 독 늪에서 며칠째 죽는 중이다.

그런데 글은 먼저 쓴다. 불교로 보는 블러드본을 쓰고 나니 같은 감독이 그보다 먼저 만든 원점이 궁금해져서, 클리어하기 전에 스토리부터 찾아 정리했다. 그러니 이 글은 스토리를 읽은 기록이고, 결말까지 다룬다. 직접 겪은 소감은 클리어하고 나서 따로 쓰겠다.

원래 계획은 단순했다. 블러드본에 대봤던 여섯 개의 렌즈를 그대로 가져와 대보는 것. 그런데 스토리를 정리할수록 계획이 어긋났다. 렌즈를 대기도 전에, 이 게임은 오프닝 시네마틱에서부터 불교가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 그 자체를 말하고 있었다.

블러드본이 이미 만들어져 있는 우주 안에서 인간이 신의 영역을 탐하다 데이는 이야기 — 번뇌의 드라마라면, 다크소울 1은 우주가 어떻게 짜였는지에서 시작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글은 1편과 모양이 다르다. 게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30초 배경

다크소울 1 스토리를 모르는 사람을 위해 최소한만.

  • 태초의 세계는 안개에 싸여 있었다. 회색 바위와 큰 나무,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고룡뿐. 변화도 시간도 없는 세계였다.
  • 그러던 어느 날 불이 나타났다. 불과 함께 차이가 생겨났다 — 열기와 냉기,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 화염 속에서 강력한 왕의 영혼들이 발견된다. 빛의 그윈, 죽음의 니토, 생명의 이자리스 마녀, 그리고 어둠의 영혼을 주운 이름 없는 난쟁이 — 인간의 조상이다.
  • 그윈과 동맹들은 고룡을 몰아내고 "불의 시대"를 연다. 신들의 번영이 시작된다.
  • 그런데 화염은 영원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약해진다. 화염이 꺼지면 어둠의 시대, 곧 인간의 시대가 순리대로 와야 했다.
  • 그윈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기 몸을 장작으로 던져 화염의 시대를 인위적으로 연장했다.
  • 화염이 사그라드는 시대, 인간들 사이에는 어둠의 표식이 나타난다. 표식을 지닌 자는 죽어도 죽지 못하는 불사자가 되고, 목적을 잃으면 서서히 의지가 꺼져 망자가 된다.
  • 플레이어는 그 불사자 중 하나다. "선택받은 불사자"라는 예언을 따라 종을 울리고, 왕들의 영혼을 모으고, 꺼져가는 화염 앞까지 간다.

이 정도면 아래 내용을 따라올 수 있다.


오프닝이 이미 본론이다

다크소울 1의 오프닝 내레이션은 창세 신화처럼 들린다. 그런데 뜯어보면 신화가 아니라 존재론이다.

태초의 세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눈여겨볼 것은 그 세계가 "나쁜 세계"가 아니라 "사건이 없는 세계"라는 점이다. 구분이 없으니 변화가 없고, 변화가 없으니 시간도 없다.

그러다 불이 일어난다. 내레이션은 정확히 이렇게 말한다. 불과 함께 차이(disparity)가 생겨났다 — 열기와 냉기, 생명과 죽음, 그리고 빛과 어둠.

순서를 잘 봐야 한다. 빛이 먼저 있고 어둠이 나중에 온 게 아니다. 열기와 냉기, 생과 사, 빛과 어둠은 동시에, 쌍으로 태어났다. 열기는 냉기가 있어야 열기다. 빛은 어둠이 없으면 정의조차 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있게 하는 대립쌍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세계에 사건이라는 것이 생겼다.

불교는 이 사태를 연기(緣起)라고 부른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어떤 것도 홀로 서지 못하고, 모든 것은 다른 것에 기대어서만 성립한다.

그림으로 그리면 격자다. 대립쌍들이 씨줄과 날줄로 교직되는 직물. 세계가 그 직물이고, 사건은 실이 아니라 실과 실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일어난다. 태초의 회색 세계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실이 한 가닥도 걸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이의 탄생은 직기(織機)가 처음 돌아간 순간이다.

억지 독해가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게임이 스스로 증거를 준다. 태양의 전사 솔라를 처음 만나면 이런 말을 한다(영어판 기준). "이 땅에서는 시간의 흐름 자체가 뒤엉켜 있어서, 수백 년 묵은 영웅들이 어른거리며 드나들지. 직물(fabric) 자체가 흔들리고, 관계는 옮겨지고 흐려진다네." 다른 세계 플레이어의 환영이 어른거리고 바닥의 메시지와 혈흔이 건너오는 이 게임의 온라인 시스템을, 게임은 "직물이 흔들린다"는 말로 설명한다. 세계를 직물로 전제해야 나올 수 있는 문장이다.

공(空) — 없음이 아니라 관계다

이 대목에서 공(空)을 짚고 가야 한다. 다크소울 1은 공에 대한 가장 흔한 오해를 정리해 주기 좋은 교보재이기 때문이다.

흔한 오해는 공을 태초의 회색 세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음. 텅 빔. 무(無). 그게 아니다.

나가르주나(용수)는 중론에서 이렇게 썼다. "연기(緣起)인 것, 그것을 우리는 공(空)이라 부른다." 공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이 연기되어 있기 때문에, 어떤 것도 저 혼자 힘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빛은 어둠에 기대서만 빛이다. 그렇다면 빛에는 어둠과 무관하게 성립하는 독립된 실체 — 자성(自性)이 없다. 그 자성 없음이 공이다.

격자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교차점은 실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사건은 있다. 불꽃처럼 화려하게 있다. 다만 어느 사건도 홀로 있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불의 시대"도 공하다. 연료가 있어야 타는 불처럼, 조건 위에 잠시 성립한 현상이지 제 힘으로 서 있는 실체가 아니다. 여기까지가 게임이 오프닝에서 깔아놓는 판이다.

그리고 비극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실체 없는 것을 붙든 자들

다크소울 1의 모든 비극은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연기로 성립한 현상을 영원한 실체로 착각한 마음이, 세계 하나를 뒤틀었다.

화염은 조건 위의 현상이라 때가 되면 잦아든다. 화염이 꺼지면 어둠의 시대, 곧 인간의 시대가 순리대로 올 것이었다. 빛과 어둠은 격자의 씨줄과 날줄이니, 한쪽의 시대가 가면 다른 쪽의 시대가 온다. 직물은 계속 짜인다. 세계는 끝나지 않는다. 끝나는 것은 그윈의 시대뿐이었다.

그윈은 그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기 몸을 장작으로 던져 화염의 시대를 인위적으로 연장했다. 표면적으로는 세계를 구한 위대한 희생이다. 하지만 격자 위에서 보면 이것은 빛의 실 한 가닥만 뽑아 영원히 쓰겠다는 시도다. 빛은 어둠과 교직되어야만 존재하는데 한 축만 남기려 하니, 직물 자체가 뒤틀렸다. 로드란 하늘에 걸린 지지도 뜨지도 않는 뒤틀린 황혼이 그 결과다. 시간이 멈춘 게 아니라, 흐르지도 끝나지도 못하게 억류된 것이다.

게임 중반에 도착하는 아노르 론도가 그 억류의 초상이다. 눈부신 햇살의 도시. 그런데 그 태양은 환영이다. 신들은 이미 떠났고, 남은 막내가 환영 마법으로 아버지 시대의 영광을 틀어놓고 있다. 끝난 시대가 화면만 켜둔 채 돌아가는 곳.

불교에서 무명(無明)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실체가 없는 곳에서 실체를 보는 눈이다. 그 눈이 집착을 낳고, 집착이 행위를 낳고, 행위가 과보로 돌아온다. 그윈만 그런 것도 아니다. 이자리스의 마녀는 약해지는 화염을 보고 화염을 인공으로 재현하려 했다. 불이 무엇인지 — 조건 위에 이는 현상이지 복제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 — 모른 채 손을 댔고, 혼돈이 폭주해 자신과 딸들이 데몬이 됐다. 백룡 시스는 고룡이면서 불멸의 비늘 없이 태어나, 비늘이라는 실체에 영원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동족을 배신했고, 영원을 연구하다 미쳐 스스로를 가뒀다. 모른다는 걸 인정했으면 시작도 안 했을 재앙을, 안다고 믿었기 때문에 벌였다 — 1편에 쓴 문장을 한 글자도 고칠 필요가 없다.

그 행위들이 어디로 돌아왔는지는 게임의 마지막 방이 보여준다. 여정의 끝, 최초의 화염 가마에서 플레이어를 기다리는 그윈은 위대한 왕이 아니다. 천 년을 장작으로 타면서 이성이 다 꺼진 잿빛 껍데기다. 말 한마디 없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든다. 게임 내내 망자를 베어 온 플레이어가 마지막에 만나는 가장 큰 망자가, 이 시대를 붙든 장본인이다. 시대의 끝을 거부한 자가 그 끝나지 않는 시대에 누구보다 깊이 갇혔다.

그 뒤로는 바퀴가 돈다. 화염은 또 약해지고, 또 다음 장작이 필요하고, 또 다음 "선택받은 불사자"가 예언을 따라 걸어온다. 플레이어를 안내하는 뱀 프람트는 그윈 쪽 존재이고, 지하 깊은 곳에는 정반대의 사명을 파는 또 다른 뱀이 있다. 계시가 둘이면 그건 계시가 아니라 영업이다. 종을 울리고 왕들의 영혼을 모으는 여정 전체가 다음 장작 후보를 걸러내는 선발 절차이고, 속편들은 같은 이야기의 리메이크가 아니라 같은 사이클의 다음 바퀴다. 1편에서 "자각 없이는 같은 바퀴가 돈다"고 썼는데, 다크소울에서 이 문장은 비유가 아니라 시리즈의 구성 원리다.

무명이 집착을 낳고, 집착이 업을 낳고, 그 업의 그늘에서 모두가 고(苦)를 산다. 죽지 못하는 불사자도, 데몬이 된 마녀도, 스스로를 가둔 용도, 잿더미가 된 왕도. 불사(不死)조차 고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니다. 그리고 바퀴는 다시 돈다(輪廻). 1편에서는 이 다섯을 각각의 렌즈로 나란히 세웠다. 다크소울 1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하나의 사슬이기 때문이다. 세계만 연기로 짜인 게 아니라, 비극도 연기로 짜였다.

마음이 세계를 결정한다 — 다크소울의 유식(唯識)

그러면 플레이어는 이 이야기의 어디에 있나.

망자화. 다크소울의 불사자는 죽어서 망자가 되는 게 아니다. 목적을 잃을 때 망자가 된다. 같은 저주를 받았어도 목적을 쥔 자에게 로드란은 여정이고, 잃은 자에게는 무덤이다. 로드란에서 마주치는 적 대부분이 악당이 아니라 먼저 온 불사자들이다. 나보다 먼저 예언을 믿었고, 먼저 목적을 잃었고, 먼저 부서진 사람들. 세계가 존재를 결정하는 게 아니라 마음이 존재를 결정한다. 유식(唯識)이 말하는 그대로다. 같은 세계란 없다. 마음의 수만큼의 세계가 있다.

인간성. 이 게임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아이템이다. 아이템 설명부터가 정체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게임은 끝내 명시하지 않지만, 태초의 난쟁이가 주운 어둠의 영혼이 인류 전체에 파편으로 흩어진 것이 인간성이라는 해석이 정설처럼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플레이어가 줍는 그 검은 불꽃 한 조각은, 티끌 하나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 전체가 담긴 파편이다. 달라이 라마가 책 제목으로 쓴 "하나의 원자 속 우주(The Universe in a Single Atom)"가 아이템으로 구현되어 있는 셈이다.

설정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게임 규칙이 실제로 그렇게 돼 있다. 인간성을 화톳불에 지피면 불이 커진다. 인간성을 바쳐 생자로 돌아와야 비로소 다른 세계의 플레이어를 부를 수 있다. 자기 안의 어둠 한 조각을 태워야 불이 커지고, 남과 이어진다.

그 이어짐의 모양이 또 그물이다. 미야자키가 이 온라인 시스템의 원형으로 밝힌 일화가 있다. 눈길에 차가 언덕을 오르지 못하자 뒤차들이 말없이 내려서 밀어주었고, 고맙다는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각자 길을 갔다는 이야기. 무수한 평행 세계의 불사자들이 서로의 종소리를 듣고, 환영으로 어른거리고, 이름도 모른 채 서로를 돕는다.

불교에 이 그림이 그대로 있다. 하늘에 그물이 걸려 있고, 매듭마다 구슬이 하나씩 달려 있다. 구슬 하나를 들여다보면 나머지 구슬이 전부 비쳐 있고, 그 비친 상 안에 또 다른 구슬들이 비친다. 화엄(華嚴)에서 세계를 그렇게 그리고, 그 그물을 인드라망이라고 부른다.

죽음과 배움. 죽으면 들고 있던 소울과 인간성은 그 자리에 떨어지고, 회수하지 못하면 사라진다. 그런데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죽으면서 배운 것이다. 저 모퉁이에 창병이 숨어 있다는 것, 보스의 두 번째 패턴, 독 늪의 지름길. 화면에 수도 없이 뜨는 YOU DIED는 벌칙이 아니라 이 세계의 날씨고, 그 날씨 속에서 재화는 끊겨도 배움은 이어진다. 유식은 이것을 종자(種子)라고 부른다. 행위는 끝나도 흔적은 심층의식에 씨앗으로 남아 다음 행위의 조건이 된다. "죽어서 배우는 게임"이라는 소울 시리즈의 별명을 유식의 언어로 옮기면 정확히 이렇다 — 현행은 끊겨도 종자는 이어진다.

어둠은 악이 아니다

태초의 화염 속에서 발견된 영혼 중 하나가 어둠의 영혼이었고, 그것을 주운 이름 없는 난쟁이가 인간의 조상이다. 플레이어가 로드란에서 줍는 인간성 한 조각이 그 영혼의 파편이라는 것이 앞에서 말한 정설 해석이다. 그렇다면 어둠은 인간을 이루는 재료다. 어둠의 시대라는 말은 인간의 시대라는 말과 같은 뜻이고, 화염이 제 수명대로 꺼졌다면 순리로 왔을 시대다.

불사자의 저주도 어둠이 만든 것이 아니다. 그윈이 인간의 어둠에 인장을 찍어 봉인했기 때문에, 어둠은 오지도 가지도 못한 채 표식이 되어 사람들 몸에 남았다. 죽어도 죽지 못하는 상태는 어둠의 성질이 아니라 어둠을 억류한 결과다. 하늘에 걸린 뒤틀린 황혼과 같은 종류의 부작용이다.

그러니 어둠은 악이라는 프레임 자체가 이긴 쪽이 쓴 문법이다. 아노르 론도의 가짜 태양이 그 문법의 정체를 한 장면으로 보여준다. 끝난 왕조가 화면만 켜둔 채, 그 화면 바깥을 전부 어둠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두 마리 뱀

여기까지 오면 어둠 쪽 손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그런데 게임은 그 자리에도 함정을 하나 파놓았다.

앞에서 계시가 둘이면 그것은 영업이라고 썼다. 그 두 번째 계시를 파는 쪽이 지하 깊은 곳의 뱀 카아스다. 그가 하는 말은 대체로 사실이다. 선택받은 불사자라는 예언은 그윈이 짜놓은 각본이고 프람트는 거기 딸린 안내원이라고 그는 폭로한다. 맞는 말이다. 좋은 영업은 원래 사실로 시작한다.

그래서 말 대신 실적을 보는 편이 낫다. 카아스는 자기 입으로 뉴 론드의 네 왕에게 인간성의 힘을 알려주었다고 말한다. 그 조언을 받은 앞 고객이 어떻게 되었는가. 왕들은 인간성을 탐하다 다크레이스가 되었고, 도시는 어둠의 심연에 먹혔고, 봉인자들이 수문을 열어 도시째 물에 잠갔다. 그리고 그가 플레이어에게 내미는 것은 다크레이스 서약이다. 다른 세계를 침공해 남의 인간성을 빼앗는 서약. 해방의 언어로 팔면서 실제로 시키는 일은 서로 잡아먹기다.

프람트도 구조가 같다. 그윈의 오랜 친구를 자처하며 플레이어를 로드베셀로 데려가고, 왕들의 영혼을 모으게 하고, 마지막에 가마로 밀어 넣는다. 둘 다 프라임발 서펀트이고, 둘 다 자기가 이 거래에서 무엇을 얻는지는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작 마지막 방에는 둘 다 없다. 그윈을 쓰러뜨리고 나면 최초의 화염 앞에 남는 것은 플레이어 하나다. 불에 손을 대면 시대가 이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걸어 나가면 화염은 꺼진다. 카아스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어도 그렇다. 서사를 판 자들은 문 앞까지만 따라오고, 마지막 한 걸음에는 이야기가 다 걷힌 채 재와 나만 남는다.

어둠의 왕이라는 이름

그렇게 걸어 나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화염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뱀들이 나타나 플레이어 앞에 무릎을 꿇는다. 내레이션은 그를 어둠의 왕이라 부른다.

해방이 아니라 즉위다. 사이클을 끊었다면서 왜 왕좌가 따라오는지는 생각해 볼 만하다. 그윈도 처음에는 옳은 일을 했다. 고룡의 멈춘 세계를 끝내고 시간이 흐르는 시대를 열었다. 그의 죄는 시대를 연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끝을 놓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둠의 왕도 천 년 뒤에 같은 자리에 설 수 있다. 어둠의 시대 역시 조건 위에 성립한 현상이고, 언젠가는 저물어야 하니까. 어둠을 고르는 일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도 붙드는 마음이 되어 같은 비극으로 갈 수 있다.

여기서 나가르주나가 왜 있음과 없음 양쪽을 다 부정했는지가 보인다. 불을 잇는 것은 이 시대가 영원히 있어야 한다는 쪽의 집착이다. 그런데 어둠을 다 끝내고 무로 돌아가는 일로 받아들이면, 이번에는 반대쪽 집착이 된다. 어둠은 무가 아니다. 빛과 짝을 이루는 격자의 한 가닥이다. 그러니 화염을 놓아주는 일의 정확한 뜻은 세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억류를 풀어 직물이 다시 짜이게 두는 것이다. 붙들지 않는 것이지 없애는 것이 아니다.

시리즈가 그 점을 확인해 준다. 1편에서 어느 쪽을 골랐든 다크소울 2와 3의 세계에서 불은 다시 이어져 있다. 작품 사이의 연결이 느슨한 편이라 못 박아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한 사람의 한 번의 선택으로 구조가 바뀌지는 않는다.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유는, 붙드는 일이 누구 하나의 성질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붙든 자들을 세어 보면 알 수 있다. 그윈은 신이고, 이자리스의 마녀도 신이고, 백룡 시스는 용이다. 인간은 뉴 론드의 네 왕뿐인데 그들도 왕의 영혼과 인간성의 힘을 손에 쥔 다음에 그렇게 되었다. 넷을 묶는 것은 종족이 아니라 처지다. 쥔 것이 있고, 그것이 줄어드는 것을 본 자. 신이든 용이든 인간이든 그 자리에 서면 똑같이 한다.

그리고 이것이 윤회라는 말의 정확한 모양이다. 불교의 윤회는 한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옮겨 갈 고정된 자아가 없다는 것이 애초에 불교의 출발점이고, 이어지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업이다. 로드란에서 벌어지는 일이 정확히 그렇다. 그윈이 환생해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가 그 자리에 와서 같은 선택을 한다. 옮겨간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선택이다.

미야자키가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그러면 이것은 미야자키가 의도한 것인가.

이 글 맨 위에 올려 둔 문장이 이야기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의 거의 전부다. 틀린 해석은 없다는 것.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그는 답하지 않고, 불교를 넣었다고 말한 적도 없다.

대신 게임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분명히 말한다. 데몬즈 소울 때부터 그가 주고 싶었던 것은 힘든 것을 넘어섰을 때 오는 뿌듯함이었고, 그래서 죽음을 벌이 아니라 배우는 계기로 설계했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말했다. 자기 게임이 어렵다는 말보다 해냈을 때 만족스럽다는 말로 불리기를 바란다고도 했다.

그가 정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어둠 엔딩의 마지막 장면이다. 불을 끄고 걸어 나가는 것으로 끝낼 수도 있었다. 그편이 깔끔하고 다 끝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거기에 뱀들이 무릎 꿇는 장면을 따로 만들어 붙였다. 누군가 그 장면을 넣기로 정한 것이고, 실수로 들어갈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이야기의 뜻은 열어 두었지만, 어느 쪽으로 끝내도 다음 사람이 같은 화염 앞에 서게 만든 것은 그다.

붙들 것인가, 놓아줄 것인가

그러면 무엇을 고르든 같은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달라지는 것이 세계가 아니라 고르는 사람일 뿐이다.

마지막 방까지 걸어온 플레이어는 그때쯤 네 가지를 안다. 화염은 원래 꺼지는 것이라는 것, 그윈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기 몸을 태웠다는 것, 선택받은 불사자라는 예언은 그 연장을 위해 짜인 각본이라는 것, 그리고 양쪽에서 길을 권하는 뱀들이 자기 몫은 끝내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윈은 이 중 아무것도 모른 채 불에 뛰어들었다.

앞에서 종자 이야기를 했다. 행위는 끝나도 흔적은 씨앗으로 남아 다음 행위의 조건이 된다. 모르고 한 행위와 알고 한 행위는 겉으로 같아 보여도 남기는 씨앗이 다르다. 모른 채 한 행위는 같은 상황이 오면 또 같은 선택을 하게 만들고, 알고 한 행위는 적어도 다음번에도 알고 고를 여지를 남긴다.

연기의 눈으로 스토리를 읽고 나면 질문이 바뀌어 있다. 불을 이을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 불을 잇는 것은 희생인가, 집착의 대물림인가. 불을 놓는 것은 해방인가, 다음 왕좌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그것을 알고 고르는가.

누구에게나 자기 화염이 있다. 지나간 전성기, 끝난 방식, 예전의 자기. 그걸 붙드는 일을 우리는 곧잘 책임감이라 부르고 희생이라 부른다. 그윈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연장은 자기만 태운 게 아니었다.

모든 것은 일어나고, 머물다, 사라진다. 불은 꺼지기에 불이다. 빛은 어둠이 있어야 빛이다. 이 당연한 산수를 받아들이지 못한 마음 하나가, 세계 하나를 천 년 동안 뒤틀었다.

나는 아직 그 가마 앞에 서 보지 못했다. 병자의 마을 독 늪에서 두 번째 종을 향해 죽고 있는 중이고, 그윈까지는 한참 남았다. 언젠가 내 손으로 그 선택을 하게 되면 — 어느 쪽을 골랐는지, 고르고 나서 무엇이 남았는지, 그때 다시 쓰겠다.